스타벅스 논란을 보며 든 생각

2026-05-30 | 분노에도 방향이 있다

책에서 이런 문장을 봤다.
사람들은 어떤 거대한 분위기 속에 들어가면, 마치 철새 떼처럼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내용이었다. 각각의 새는 왜 남쪽으로 가는지 모른다. 누가 그 이동을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함께 날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상한 흥분과 해방감을 느낀다.
최근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논란을 보면서 그 문장이 떠올랐다.

물론 기업이 역사적 상처를 건드릴 수 있는 표현을 가볍게 쓴 것은 비판받을 수 있다. 불매운동도 정당한 항의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이상하게 느낀 건 그다음이었다.
어느 순간 논란은 이 표현이 왜 문제인가를 따지는 일에서 너는 불매에 동참하느냐를 확인하는 일로 바뀌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불매를 선언했고, 누군가는 동참하지 않는 사람을 의심했다. 사건은 점점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의 문제가 되어갔다.

탱크데이 논란에서 내가 본 것은 단순히 스타벅스가 잘했느냐 못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하나의 도덕적 대열을 만들고, 그 안에서 복잡한 판단을 내려놓는 방식이다. 불매는 정당한 항의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동참하지 않으면 적"이라는 분위기로 바뀌면, 그때부터는 군중심리에 가까워진다.
이때 사람들은 분노를 통해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무엇이 옳은지 복잡하게 따질 필요 없이, 한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복잡한 현실을 오래 견디기 어렵다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불매가 맞는지 아닌지, 비판과 조롱의 경계는 어디인지. 이런 질문들은 피곤하다. 답도 바로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하나의 구호는 편하다.

불매하자. 저쪽이 문제다. 동참하지 않으면 다른 편이다.

이런 말들은 단순하다. 단순한 말은 사람을 빠르게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은 묘하게 편안해진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편에 있고, 상대는 틀린 편에 있다. 이보다 간단한 세계관은 드물다. 그래서 분노는 불편한 감정이면서도 동시에 편한 감정이다. 분노는 내가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지,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안전한지 알려준다. 문제는 그 순간부터 내가 정말 생각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나는 내 판단으로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흐름 속에서, 안전한 쪽을 내 생각처럼 고르고 있는 걸까.

불매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분노하지 말자는 말도 아니다. 다만 어떤 분노가 너무 쉽게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면, 그때는 한 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갑자기 정의로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냥 군중 속에서 안전한 자리를 찾은 것인지.
물론 이렇게 말해놓고도, 막상 분위기가 뜨거워지면 나도 휩쓸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