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약약강에 대하여

2026-02-02 |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건 강약약강이라고 생각한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갑자기 합리적인 사람이 된다. 말도 조심하고, 표정도 관리하고, 상대 입장도 이해하려 든다. 그러다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게 원칙이 많아진다. 기준이 생기고, 질서가 생기고, 교육이라는 말이 나온다.

참 편리한 정의감이다.

결국 강약약강은 이런 것이다.

나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 다만 안전하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함부로 한다.

이게 너무 구리다.

사람은 왜 자기보다 약하거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지배하려 들까. 왜 기다려주기보다 눌러보려 하고, 도와주기보다 깔보려 하고, 설명하기보다 혼내려 들까.

대단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대체로 자기 삶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깨지고, 사회에서 밀리고, 강한 사람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어디 가서 자기 힘을 확인할 곳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만만한 상대를 만나면 갑자기 숨통이 트이는 모양이다.

신입. 어린 사람. 말을 잘 못 하는 사람. 돈 없는 사람. 착해서 웬만하면 참고 넘기는 사람. 상황상 떠날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 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커진다.

말하자면 싸구려 권력 체험판이다. 위험은 적고, 반격 가능성은 낮고, 본인은 잠깐 세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기 삶은 통제하지 못하면서, 남의 표정과 행동을 통제하면서 잠깐 위안을 얻는 것이다.

문제는 그게 위로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점이다.

살다 보면 그런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본다. 윗사람 앞에서는 농담도 잘 받아주고, 실수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다 아래 사람 하나 실수하면 갑자기 조직의 미래를 걱정한다. 평소엔 대충 넘어가던 사람이 그때만큼은 기준과 원칙의 수호자가 된다.

웃긴 건 본인도 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자기가 누구 앞에서 조심하고, 누구 앞에서 함부로 하는지 대충은 안다. 다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인정하는 순간 너무 없어 보이니까.

그래서 포장을 한다.

나는 원칙을 말했을 뿐이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사회생활 원래 그런 거다. 이 정도도 못 견디면 어떻게 하냐.

이런 말들.

살면서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말을 즐겨 쓰는 사람 중에 정말 원칙적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원칙적인 사람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강한 사람 앞에서도 비슷하고, 약한 사람 앞에서도 비슷하다. 오히려 약한 사람 앞에서 더 조심한다.

그 사람이 바로 반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내 말 한마디가 오래 남을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내가 가진 작은 힘이 상대에게는 크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런데 비겁한 사람은 반대로 한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예의가 생기고, 약한 사람 앞에서는 본성이 나온다.

사실 강한 사람에게 잘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거기에는 계산이 들어간다. 잘 보여야 하고, 손해 보면 안 되고, 관계 망치면 불리하니까. 그 앞에서 예의 바른 건 인격이라기보다 생존 기술에 가깝다.

진짜는 내가 함부로 해도 될 것 같은 사람 앞에서 나온다.

식당 직원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알바생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나이 어린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실수한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보다 느리고, 서툴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거기서 대충 보인다.

나는 사람을 볼 때 이걸 꽤 중요하게 본다. 나한테 잘하는 건 별로 믿지 않는다. 나한테 잘해야 할 이유가 있으면 누구나 잘할 수 있다. 진짜 봐야 하는 건 그 사람이 굳이 잘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다.

거기서 못나게 굴면 끝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통해 자기 수준을 드러낸다. 자기가 가진 권력을 어떻게 쓰는지가 그 사람의 바닥이다. 힘이 있을 때가 아니라, 힘을 함부로 써도 될 것 같을 때 드러난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할 때. 상대가 나를 못 이길 때. 내가 조금 모질게 굴어도 세상이 문제 삼지 않을 때.

그때 어떻게 하느냐.

그게 사람이다.

강약약강인 사람은 대체로 불안정하다. 겉으로는 세 보이지만 사실은 계속 서열을 확인해야 안심하는 사람이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알아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 존중받을 자신이 없으니까 누군가를 눌러서라도 위에 있고 싶은 사람.

그래서 약한 사람을 보면 도와줄 생각보다 비교할 생각을 먼저 한다.

쟤보단 내가 낫지.

이 감각이 생각보다 달콤하다.

내가 대단해지지 않아도 된다. 내가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누군가를 낮추면 잠깐 내가 올라간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나 쉬운가. 운동해서 몸을 만드는 것보다, 공부해서 실력을 쌓는 것보다, 삶을 바꿔보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쉽다.

누군가를 깎아내리면 된다. 누군가를 우습게 만들면 된다. 누군가의 부족함을 크게 말하면 된다.

싸구려 위안이다.

근데 사람은 그 싸구려 위안에도 쉽게 중독된다. 한 번 누군가를 밟고 올라선 기분을 맛보면, 다음에도 비슷한 대상을 찾는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 말 못 하는 사람. 착한 사람. 눈치 보는 사람. 상황상 떠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자주 표적이 된다.

나약해서가 아니다. 상대가 비겁해서 그렇다.

여기서 더 구린 건, 이런 태도가 개인의 성격만으로 생긴 게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가 오랫동안 그렇게 가르쳤다. 위에는 숙이고, 아래에는 군림하는 법. 나이, 직급, 돈, 학벌, 성별, 외모, 말투, 출신 같은 걸로 사람의 등급을 빠르게 매기는 법.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 전에 위치부터 본다.

쟤는 나보다 위인가. 아래인가. 건드려도 되는 사람인가. 조심해야 하는 사람인가.

이런 식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습관이 몸에 배면, 존중은 사라지고 처세만 남는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존을 위해 숙이고, 아래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보상처럼 군림한다.

자기가 당한 걸 끊어내지 못하고, 더 약한 사람에게 다시 흘려보내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군대에서도 그랬고, 회사에서도 그랬다. 당한 사람이 나중에 권한을 잡으면 신기하게 비슷한 짓을 한다. 본인은 다를 줄 알았는데, 막상 자리가 생기면 옛날에 싫어하던 사람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의 바닥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나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 이상으로 엄격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괜히 아는 척했을 수도 있고, 상대가 반박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말을 세게 한 적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남이 나에게 한 무례함은 오래 기억하면서, 내가 남에게 한 무례함은 대충 사정이 있었다고 처리한다.

인간이 좀 그렇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내가 강한 위치에 있을 때. 상대가 나를 어려워할 때. 내 말이 쉽게 통과될 때. 내 기분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망칠 수 있을 때.

그때가 제일 위험하다.

진짜 강한 사람은 그럴 때 함부로 하지 않는다. 자기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상대가 약하다는 이유로 더 세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격하지 못할 사람 앞에서 더 조심한다.

그게 품격이다.

나는 강약약강을 단순히 성격 나쁜 정도로 보지 않는다. 그건 인간의 바닥에 가까운 태도라고 생각한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만 안전하게 잔인해지는 것. 세상에게 받은 모멸을 더 약한 사람에게 청구하는 것. 자기 열등감을 남의 부족함 위에 올려놓고 잠깐 숨 쉬는 것.

그런 사람은 오래 곁에 두면 위험하다.

지금은 나에게 잘할 수 있다. 내가 그 사람에게 필요하거나, 내가 아직 쓸모 있거나, 내가 같은 편이거나, 내가 어느 정도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살다 보면 언젠가 약해진다.

실수할 때도 있고, 돈이 없을 때도 있고, 몸이 아플 때도 있고, 일이 안 풀릴 때도 있다. 예전만큼 쓸모 있지 않은 순간도 온다. 그때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던 사람은, 내가 약해지는 순간 나에게도 그렇게 한다.

그래서 봐야 한다.

그 사람이 강한 사람 앞에서 얼마나 예의 바른지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얼마나 조심하는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지보다, 자기에게 아무 이득 없는 사람에게 얼마나 함부로 하지 않는지.

대단한 선행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함부로 안 하는 사람. 상대가 부족해 보여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내가 더 안다고 해서 상대를 우습게 만들지 않는 사람. 내가 이길 수 있다고 해서 굳이 이기려고 들지 않는 사람.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이다.

강약약강은 강함이 아니다.

그건 그냥 겁이다. 강한 사람에게는 대들 용기가 없고, 약한 사람에게는 다정할 그릇이 없는 것.

딱 그 정도의 인간.

그리고 살면서 그런 인간은 생각보다 많이 만난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그런 인간이 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